아버지의 유언 정보
아버지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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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살때 아버지가 죽고 내가 열두 살때 어머니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고 피죽도 먹을수 없어 열 살때 깔둥이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배가 부르면 좋았고 배가 고프면 괴로웠다. 삼십이 되어서야 이름 석자 쓸수 있었다.
혼인신고 하러 가는데 한문은 이장한테 부탁했고 한글은 외워서 갔다.
내 이름이 왜 조만석인지 아냐, 만석을 부리는 농사꾼이 되라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열여섯 먹던 해,처음으로 세경이라는 것을 받았다.열 섬 중 세 섬은 선세경으로 받고 나머지 일곱섬은 가을이 끝나고 받았다.
석 섬을 몇 년 모아 소를 샀고 일곱 섬을 10여년 모아 매미걸 논 두 마지기를 샀다.
너희 엄마는 주인집 애기담살이였다.주인집 아이들을 너희 엄마가 다 키웠다.
내가 열아홉때 너희 엄마는 열한 살이었다. 너희 엄마는 나보다 글을 먼저 알았고 계산도 빨랐다.일 매무새가 찰졌다.
바느질을 어른보다 더 잘했다.
노래도 잘하고 뜀박질도 잘하고 지금 같으면 쳐다보지 봇했을 위인이다.너희들이 엄마를 닮은것이
천만다행이다.
시압시 시엄시 없이,장인 장모 없이 결혼했다.
지금 집터가 원래는 윤씨네 제각터였다.제각지기로 살림을 났고 육십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았다.안 해본 일이 없다.
저수지 만들때 미제 밀가루 한 말 타려고 돌을 골백번 날랐다. 매미걸 논을 벌기 위해 삽으로 물고랑을
만들었다.
심이라고 아냐? 우리 고랑에는 심이 있다.뼈대다.아무리 장마가 져도 허물어지는법이 없다.동네 돌독보다
무거운 돌을 져심을 박았다. 리어카가 나오기 전까지 지게로 돌을 날랐다.
너희엄마는 남들이 보지않는 저녁에는 지게를 졌다.갱변 돌을 둘이 날랐다.너희 엄마 허리가 그때 망가졌다.
승철아,너 어렸을적,일한다고 방안 문고리에 허리를 묶어 놓고 나갔다. 오면 똥 오짐 범벅이었지만
용케 안 다치고 잘 자랐다. 동생들 잘 건사해 준 것이 지금도 고맙다.
승자야,엄마를 닮아 머리가 좋고 뭐든지 빨랐는데 갈치지 못했다. 너희 담임선생님이 와서 지역의 여고라도
보내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인천으로 보낼때 너희엄마도 나도 많이 울었다.
승호야,미안하다.
니가 월남에서 보낸 돈으로 논을 샀다.팔 하나 없이 돌아와서 세탁소를 열고 지금까지 새끼들 낳고
살아준 것이 고맙다.팔 하나 나갈 때 얼마나 아팠냐 물어보지 못했다.
막둥아,농대에 간다고 했을때 면서기가 최고라고 주저앉힌 것이 미안하다.오늘까지 농사를 다 해준 니가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구십 평생 한 것은 농사와 담배다.셋째 넷째는 담배를 끊어라. 나는 아버지 어머니 목숨값으로
구십까지 살았다. 내가 더럽게 오래 살아 너희들이 걱정이다.
농사는 열다섯 마지기다.
넷째가 주말이면 와서 엄마를 도와라. 니희 엄마 죽기 전까지 논을 처분하지 마라.내가 땅이다.
이 평생 그 땅에서 너희들을 낳았고 너희들을 길렀다.
너희 엄마 죽으면 땅을 처분해 공평하게 나누어라.정확하게 4등분해서 각자 처리해라.
누구든지 농사를 업으로 삼지는 마라.
장례비 아끼지 말고 직신박신 어른들 대접해라.
돼지고기도 홍어도 국산으로 해라.평생 다 갚어도 못........................
한 인생이, 한과 역사가 그렇게 지고 있습니다. 아짐 택호가 없이 평생 만석이 아재로 살던,
동네 젊은이들이 함부로 이름을 불렀다는 이 시대의 농사 장인이 물러 갔습니다.
핑갱소리 앞세우며 한 인생이 한 점으로 사그라질 때 황금물결을 이루며 찰랑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인 잃은 경운기는 주인을 잃은지 모르고 제 자리에 서 있고
올해 받은 나락포대는 자크를 연 채 가지런히 포개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기도 하고 누군가는 전망없는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을 합니다.
내년 총선에 출마할 선량한 정치인들은 한때만 존경하는 유권자들을 찾아 어슬렁 거리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나락값 보장 플래카드는 가을 가뭄에 메마른 입기침을 연신 내뱉습니다.
살 오른 전어는 불판에서 저녁마다 화형당하고 삶에 절은 소주병은 소금빛을 뿜으며 식탁위에 쓰러집니다
한 인간의 시대가 누구의 주목도 없이 저무는 동안 한 시대가 다시 만들어집니다.
가을이 깊은 세월속으로 한땀 한땀 걸어 갑니다.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강광석 (경향신문에 기고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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